[한겨레] 기획 강간죄를 묻는다 ①
‘폭행·협박’ 따지는 강간죄…‘동의 여부’로 판단해야
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78009.html
현실과 거리 먼 강간죄 규정
‘형법 297조’ 폭행·협박 중심
피해자 적극 저항 증거 요구
‘가짜 피해자’ 낙인의 근거
30년 동안 강간죄 개정 요구
국회 ‘나 몰라라’ 시기상조론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여성들 목소리에 응답할 때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기 시작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90년만 해도 성폭력 신고율은 2.2%에 불과했다.(한국형사정책연구원, 1990) 다른 범죄 피해와 달리 유독 성폭력 피해자들은 주변의 의심과 비난의 따가운 시선, 소문, 각종 불이익 및 인권침해 등 2차 피해에 시달린다. 심지어 가해자로 지목된 상대나 그 주변인으로부터 무고나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현상의 근저에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 형법의 강간죄 조항(297조)이 있다. 여기에서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를 의미했다. 일부 판례에서는 성폭력에서 보호할 가치나 대상(보호법익)을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었는지 여부로 판단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법정은 여전히 성폭력 때 심한 폭행·협박이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최협의설’(법조문을 가장 좁게 해석하는 것)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폭행·협박의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할 것을 요구받고 있고, 그러지 않은 경우에는 ‘가짜 피해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전국의 66개 성폭력상담소가 2019년 1~3월 접수한 강간 및 유사강간 사례 총 1030건 중 71.4%(735건)가 현행법에서 요구하는 폭행 또는 협박이 없는 사례들이다.
한해 성폭력 상담만 28만건 육박
얼마나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그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는지는 국가의 성폭력 범죄처리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여성가족부의 2019년 자료를 보면(국가지표체계), 전국의 168개 성폭력상담소에서 2019년 한해 동안 27만6122건의 성폭력 상담을 했다. 2018년 한해 동안 검찰에 고소된 성폭력은 3만2104건이다.(대검찰청, 2019) 성폭력 피해자들 중 몇 퍼센트가 성폭력상담소에 상담을 하고, 또 수사기관에 고소했는지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실제 피해에 비해 고소는 훨씬 적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2018년 ‘#미투운동’이 혁명처럼 일어나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를 촉구하고 있는 시점에서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운동이 다시 본격화되고 있다. 2019년 3월에 전국 208개(2021년 1월 현재 209개) 단체들이 연대한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운동은 성폭력 범죄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 즉 성폭력의 의미와 판단기준에 문제를 제기한다.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운동의 역사는 짧지 않다. 1991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 당시에는 형법 제32장의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땐 폭행·협박으로 강간을 판단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는 ‘정조’의 개념이 얼마나 전근대적인지, 이른바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정조’인지 아닌지가 강간죄의 판단근거가 된다는 점을 주로 비판했다. 1994년 제정된 성폭력특별법은 성폭력에 대한 기본개념 규정 없이 형법의 각 조항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고, 강간죄의 구성요건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했다.
여성운동단체가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성폭력특별법 제정 이후 10여년이 지난 2005년부터였다. ‘여성인권법연대’는 형법학자와 활동가들이 모여 2년 동안의 지난한 논의 끝에 형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이 형법 개정안의 핵심은 ‘동의 없는 성적 행동’의 처벌규정 신설, 최협의 폭행·협박설 폐기, 친고죄 폐지였다.
여성인권법연대의 형법개정안은 성폭력 관련 형법 체계를 뒤흔든 획기적인 내용으로 당시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이 대표발의를 하고 공청회도 개최했지만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 채 17대 국회 회기만료로 자동폐기되었다. 그럼에도 이 형법개정안은 이후 성폭력 관련법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현재의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운동에도 준거틀이 되고 있다.
2004년부터 시작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의 ‘수사·재판시민감시단’ 활동은 형사사법 절차에서의 ‘2차 피해’에 주목했다. 전국의 각 상담소에서 직접 피해생존자를 지원하면서 수사와 재판 과정을 모니터링하여 그해의 성평등 디딤돌과 걸림돌을 추천하고 ‘수사·재판시민감시단’에서 이를 심사하여 선정·발표하는데, 대부분 강간죄 구성요건에 대한 해석과 맞닿아 있는 사례들이다. 이 외에도 각 단체들에서 ‘성폭력을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 바꾸기 운동’이나 성폭력 피해자 재판동행 지원단 ‘첫사람’ 운동 등을 계속해왔다.
‘#미투운동’ 이후 20대 국회에서는 발빠르게 성폭력 관련 법안 150여개가 발의되었고, 일부 법안은 국회를 통과해 시행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지만 상당수 법안이 형량을 강화하는 수준에 머무는 등 근본적인 문제들은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강간죄 구성요건과 관련한 개정 법안이 2018년 3월부터 2019년 6월까지 10개가 발의되었지만,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등을 둘러싼 여야 대치로 뒷전으로 밀렸다.
강간죄 개정 법안은 미투운동이 가져온 ‘선물’이자 준엄한 ‘요구’였음에도 발의한 의원들 중 누구도 적극적으로 법안의 통과를 위한 추후 활동을 하지 않았다.
주무 부처인 법무부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시기상조론으로, 법원행정처는 신중론으로 의견을 제출했다.(전상수, 2019) 또한 10개나 되는 법안이 상정되었다는 것이 그만큼 주요한 사안으로 인식되기보다 오히려 서로 합의되지 않아 시간이 필요한 사안이라며 법안 처리를 기피하는 핑계로 작용하였다. 결국 20대 국회 회기만료로 이들 법안은 모두 자동폐기되었다.
21대 국회에서는 현재까지 2개의 법안이 발의되었다. 백혜련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형법 297조의 ‘폭행·협박’을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로 바꾸었고, 류호정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형법 32장의 제목을 ‘강간과 추행의 죄’에서 ‘성적 침해의 죄’로, 297조의 내용도 ‘상대방의 동의 없이’로 고쳤다.
시대착오적 용어에 논란 가중
현재 국회나 언론에서는 강간죄 구성요건에서 ‘동의 여부’와 관련한 규정을 주로 ‘비동의 간음죄’로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간음’의 사전적 의미가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 성관계를 맺음’이고, ‘간음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성관계를 맺다’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비동의 간음죄’는 용어상 성폭력의 특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한자어인 간음(姦淫)은 간통, 간악하다는 뜻의 간(姦)을 채용하고 있는데 이는 여(女)를 세번 쌓아 쓴 여성혐오적 한자 표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잘못된 의미의 용어는 폐기되어야 한다.
강간을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판단하는 것에 대해 피의자나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 측면에서 논란의 소지가 많다는 지적이 있다. “범죄 행위자의 처벌 여부가 전적으로 피해자의 의사에 따라 좌우된다는 불합리한 결과”(이영란, 1994)라거나, “그 행위 양태가 다양하고 외연이 불분명해 명확성을 본질적 요소로 갖는 형법상의 범죄로 규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따른다”(서보학, 1998)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법원은 이미 내심의 의사에 따라 판단하는 객관적 기준을 마련해두고 있다. “피해자에 대하여 이루어진 행위에 대하여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그 행위의 경위 및 태양(양태), 피해자의 연령, 범행 당시의 정황 등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볼 때 그 행위로 인하여 피해자의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구체적·개별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판례(대법원, 2019도3341 판결)가 제시하는 방향성은 이미 변화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폭행·협박·위력은 없었지만 동의 없이 이뤄진 성교가 범죄로 처벌되는 것은 과잉범죄화의 폐해를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즉, “피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무조건 형법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여성주의의 ‘적’인 가부장주의의 관념의 산물일 수 있다”(조국, 2003)는 지적이다. 그러나 미투운동에서도 명확하게 보여주었듯이, 강간죄를 ‘동의 여부’로 판단한다는 것은 “강간에 대한 현재의 법률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문제제기이자, 강간 피해 경험을 가진 여성들이 법률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신들의 경험을 법률 속에 새롭게 담아내려는 시도이며, 강간의 판단기준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가해자로부터 피해자에게로 이동시켜 보다 균형 잡힌 법률 해석을 가능하게 할 것”(이유정, 2007)이다. 그리고 이러한 비동의 요건은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보호법익과의 조화와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의 최소화, 그리고 형사법 원칙과 체계에 부합하는 입법에 대한 고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장다혜·이경환, 2018)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각 분야에서 경력이 10년 이상 되는 경찰, 교수, 검사, 판사, 변호사, 엔지오(NGO) 활동가 등 전문가 48명의 의견을 조회한 결과 응답자의 54.2%는 ‘폭행·협박의 유형력(신체적 고통을 주는 물리력) 요건을 제거하고 비동의 요건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응답했다.(장다혜·홍영오·김현숙, 2018)
최근의 미투운동은 형법 개혁 논의의 중요한 계기이지 당장 형법을 개정해야 할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영국의 경우 50년 만의 형법 개정에서 30여년에 걸친 여성주의적 요구를 반영하여 2003년 성범죄법을 개정한 사례를 들기도 한다.(김한균, 2018) 이러한 시기상조론은 실제 상담 현장에서 강간 피해자의 71.4%가 폭행·협박이 없는 상태에서 피해를 입고 있는 현실에 무감각한 주장이다. 또한 이는 1991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운동 당시부터 30여년 동안 한결같이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개정하라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다양한 운동 흐름을 간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폭행·협박을 중심으로 강간죄를 판단해도 피해자들이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하는 현실에서 강간죄를 ‘동의 여부’로 판단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큰 도전이기도 하다. 실제 “성관계 때 각 단계마다 동의확인서를 받아야 하느냐”, “녹음을 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비동의를 ‘내숭’ 정도로 치부하는 한국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 시각 또는 ‘강간 신화’를 먼저 지적(유주성, 2016)해야 할 문제이다.
유엔도 “형법 297조 개정” 권고
그동안의 성폭력 관련법 제·개정 과정을 돌아보면, 어떤 변화도 저절로 오지는 않았다. 법 규정 하나하나가 수많은 피해자들의 용기와 여성운동단체들의 연대로 가능할 수 있었다. 이번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 즉 ‘최협의설 타파’ 운동은 더 이상 피해자들에게 피해 당시 폭행·협박이 있었음의 증명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에게 피해자의 명확한 동의가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형성된 법의 ‘합리성’이나 ‘객관성’이 얼마나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배제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미투운동이 던져준 과제 중 하나는 성폭력을 규율하는 형법체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젠더권력의 편향성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이호중, 2019) 따라서 강간죄 구성요건의 개정은 미투운동에 응답하는 것이다.
여성운동 현장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셀 수 없는 감동의 순간들, 미투운동은 우리에게 연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고 아름다우며 힘을 내게 하는지를 절감하게 한다. 이제 일상생활에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성인지 감수성’을 갖추고, 강간죄 구성요건을 변화시키는 법제화를 이뤄내고 우리 사회 성문화를 바꿔가야 할 시점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2018)에서도 우리 정부에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다행히 미투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던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의 ‘위력’에 대해 법원이 2019년 내린 전향적인 판결로 우리 사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2020년에도 이어진 전 부산시장과 전 서울시장의 위력 성폭력 사건은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더디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운동은 현행 ‘강간죄’의 구성요건이 구체적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권리를 어떻게 침해하고 여성들의 일상을 위협하는지, 이후 운동방향을 어떻게 세워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탐구, 도전, 연대를 계속해 갈 것이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미투가 있다/잇다>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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