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획 강간죄를 묻는다 ②
저항 못할 ‘폭행·협박’ 없으면 강간죄가 아니라고?
www.hani.co.kr/arti/society/women/980035.html
성폭력사건 재판, 가해자 행위보다
피해자 저항과 두려움 정도 더 중시
강간죄 기준 ‘폭행·협박’인 탓
폭행·협박 여부도 고무줄 판단
1·2심 유무죄 번복 판결 이어져
‘동의’로 바꾸고 기준 다듬어야
‘감자탕 성폭력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19년 11월이었다. 언론 보도를 보면, 이 사건 피고인은 채팅 앱으로 처음 만난 여성과 식당에서 감자탕과 함께 소주를 마셨다. 식사 뒤 피고인은 차를 운전해 여성을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이어 주차장에 도착한 피고인은 차 안에서 성폭력을 저질렀다. 피해자가 “하지 말라”고 여러 차례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무시했다. 피고인은 강간과 음주운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음주운전 혐의만 인정해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강간 혐의에는 “피해자 의사를 무시하고 성관계를 한 것은 인정”되지만 “피고인이 상대방의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로 폭행·협박하지 않았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오히려 피해 여성이 식당에서 감자탕에 있는 고기를 피고인 접시에 놓아준 점 등을 들며 “피해자가 성관계에 대해 묵인한 것으로 피고인이 오해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판결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공분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2심에서 뒤집혔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무리하게 저항했다가는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강간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2년을 선고했다. 피해자가 피고인을 “밀치거나, 고개를 젓는 정도로는” 저항이 불가능한 폭행·협박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1심 판결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똑같은 성폭력 사건도 재판부마다 판결이 다를까? 이유는 현행 형법의 강간죄 판단 기준이 ‘폭행 또는 협박’이기 때문이다.
강간 사건 판결서 52건 열람·분석해보니
대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 시스템’을 통해 2018년 7월1일~2020년 6월30일 2년간 확정된 사건 중 사건명이 강간(강간등, 강간미수, 강간치상·상해, 강간치사·살인 등 포함)으로 분류되고 ‘무죄’와 ‘파기’라는 두 키워드가 동시에 포함된 판결서 52건을 열람·분석했다. 판결이 상급심에서 달라진 경우를 더 알아보고 싶었다. 앞서 본 감자탕 성폭력 사건의 강간과 음주운전 혐의처럼 한 판결서에서 여러 혐의를 다루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 글에서는 강간 혐의에 대한 판단만 살펴보고자 한다.
분석 대상 52건 중 1심과 2심 판단을 비교했을 때 강간 혐의 중 단 한 건이라도 유무죄 판단이 다른 판결은 20건이었다. 그중 유죄에서 무죄로 뒤집힌 판결은 3건, 무죄에서 유죄로 뒤집힌 판결은 17건이었다. 21건은 유죄 판결은 유지했는데 형량이 바뀌었다. 1심보다 형량이 줄어든 판결은 18건에 달했으나, 형량이 가중된 판결은 3건에 그쳤다. 나머지 11건은 유무죄 판단과 형량이 바뀌지 않았다. 이는 대부분 법 개정 내용을 반영하지 못해 생긴 오류, 공소장 변경 등 ‘직권 파기’ 사유가 있는 경우였다.
판단이 바뀐 사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 재판부의 판단이 상충하는 주된 쟁점은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가’였다. 현행 형법 제297조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강간죄 판단 기준이 폭행·협박 여부이므로, 설령 피고인이 피해자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한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다고 인정되지 않으면 무죄가 된다.
특히 성폭력을 ‘정조에 관한 죄’로 봤던 과거에는 판단 기준을 ‘상대방의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으로 최대한 협소하게 해석했다. 이를 ‘최협의설’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법원은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또는 성적 자유 침해의 죄’로 보고 있고, 이에 따라 판례도 점점 변화해왔다. 그러나 보수적 재판부나 경험이 적은 하급심일수록 여전히 최협의설에 따라 폭행·협박 여부를 엄격히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죄에서 유죄로 바뀐 판결서를 살펴보면, 똑같은 사건에 대해 1심은 “폭행·협박을 하였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본 반면 2심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유형력(힘)을 행사했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을 폭행·협박으로 볼 것인지뿐 아니라 얼마나 강한 폭행·협박이어야 ‘상대방의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라고 인정할 것인지도 재판부마다 달랐다. 예를 들어 피고인이 “주고받은 (사생활이 담긴) 메시지를 에스엔에스(SNS)에 공개하겠다”며 피해자를 범행 장소로 오게 해 강간한 사건이 있었다. 1심은 피고인이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협박을 하여 간음 행위를 한 사실”을 인정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반면 2심은 피해자가 피고인의 협박으로 “피고인과의 성관계를 거부하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며 “항거가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로 외포(몹시 두려워함)되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 2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성격이나 평소 행실을 근거로 사생활 폭로 협박 정도로는 피해자의 저항이 불가능하지 않았다고 봤다. 가해자의 행위나 의도, 성폭력 상황과 과정보다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가,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는가’를 기준으로 폭행·협박 여부를 판단한 것이다.
성관계 ‘당시’에만 폭행·협박 없으면 무죄?
폭행·협박을 한 시점도 중요했다. 저항이 현저히 곤란할 정도로 폭행·협박한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그 폭행·협박과 강간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는 경우 재판부마다 판단이 상이했다. 가령, 피해자를 흉기로 위협해 1차 강간하고 피해자 신체를 촬영한 후 며칠 뒤에 2차 강간한 사건이 있었다. 1심은 “피해자가 피고인의 성관계 요구를 거절할 경우 강도 높은 폭행·협박이 뒤따를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이었으므로 피해자로서는 그 두려움 때문에 적극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모든 혐의에 유죄를 선고했다. 반면 2심은 흉기를 사용한 1차 강간은 “항거하기가 현저히 곤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며 유죄로 봤지만, 며칠 후 발생한 2차 강간은 “피해자의 억압된 상태가 그대로 지속되었을 것인지 의문”이고 “성관계 당시에는 별다른 폭행·협박이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이 1차 강간 때 촬영한 피해자 신체 영상을 가지고 있는 점, 피해자가 불과 며칠 전 흉기로 위협당한 기억 때문에 너무 무서웠다고 진술한 점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드물지만, 먼저 폭행·협박한 사실이 명백한 경우에는 범행 당시에도 묵시적 협박이 있었다고 판단하는 재판부도 있었다. 예를 들어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불법촬영 동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해 범행 장소로 불러낸 후 여러 차례 폭행하고, 잠시 후 화해하자면서 강간한 사건이 있었다. 1심은 “피고인이 피해자를 협박하여 강간하였음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강간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2심은 피고인이 “성교를 요구하면서 명시적으로 해악을 고지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성교를 계속 거부하면 피해자에게 다시 폭행하는 등의 위해를 가할 것처럼 묵시적으로 피해자를 협박함으로써, 겁을 먹고 항거 불능 상태에 빠진 피해자를 강간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가 누구냐는 복불복?
2019년 1~3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통해 전체 66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강간(유사강간 포함) 상담사례를 살펴보면, 1030명 중 직접적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피해는 71.4%(735명)에 달하고, 직접적 폭행·협박이 행사된 사례는 28.6%(295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강간 사건 판결서를 분석해보니 직접적 폭행·협박이 있어도 피해자는 어떤 재판부를 만나느냐에 따라 상반된 판결이 나오는 불안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이는 피해자가 법적으로 피해 사실을 인정받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성폭력 신고는 어려워진다.
게다가 여전히 ‘피해자다움’이라는 통념으로 피해자 진술을 의심하는 재판부도 많았다. 피해자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재판부는 피고인과 연인관계였다거나, 즉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거나, 피해 이후에도 피고인과 연락했다는 등의 사유를 들었다. 재판부가 생각하는 피해자다움에 맞지 않으면 “강간 피해를 당한 사람의 태도로는 이례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성인지 감수성이 없는 재판부를 만나면 오히려 사법기관에 의한 2차 피해를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이다. 언제까지 피해자의 권리보장을 ‘운’에 맡길 것인가?
만약 강간죄 판단 기준을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꾼다면 판결은 어떻게 변할까? 재판부는 얼마나 강한 폭행·협박이 있었는지를 보는 대신 피고인이 어떻게 피해자의 동의를 구했는지 판단할 것이다.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다면 범행 당시 직접적 폭행·협박이 없더라도 성폭력으로 인정해 처벌할 것이다. 저항이 현저히 곤란할 정도로 폭행·협박하지 않았으면 합의한 성관계라고 보는 가해자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피해자 관점으로 동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토론과 숙고가 이어질 것이다.
일각에서는 동의 여부가 피해자 주관에 따라 좌우되므로 강간죄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판결서를 살펴보니 지금도 법원은 동의 여부를 판단하고 있었다. 피고인들이 대부분 ‘합의한 성관계이므로 폭행·협박하여 강간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폭행·협박한 사실이 명백한 경우에는 피고인이 어떻게 주장해도 합의한 성관계로 인정하지 않는 재판부가 많았다.
문제는 피해자의 동의 여부를 기계적으로 판단하는 경우다. ‘감자탕 사건’ 1심 재판부는 고기를 덜어준 것을 가해자가 성관계에 대한 피해자의 묵시적 동의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확대해석하지 않았던가. 분석 대상 판결서들 중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여러 건 발견했다. 그중 피해자가 강간 시도에 저항하면서 몰래 112에 신고한 후 경찰을 기다리던 중 유사강간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1·2심은 유사강간 혐의에 대해 “피해자가 경찰이 찾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것으로서, 피고인의 폭행·협박에 의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경찰의 구조가 필요할 만큼 위험에 처한 피해자가 상대를 자극하면 더 큰 피해를 입을까 봐 ‘강하게 저항하지 않은 것’을 ‘사실상의 동의’로 본 것이다. 이는 재판부가 강간죄를 판단할 때 동의 여부를 폭행·협박의 부수적 기준으로만 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지금처럼 강간죄의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폭행·협박일 때 피해자의 ‘저항 없음’은 손쉽게 ‘동의’로 왜곡되며, 피해자의 실질적 의사는 고려되지 않는다.
동의 여부를 강간죄의 중요한 기준으로 정립하면 지금과는 달라질 수 있다. 법원이 피해자에게 왜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는지 책임을 지우는 대신 자발적으로 성관계에 동의했는지, 자유로운 의사로 성관계를 거부하거나 동의할 수 있는 상태였는지 살피게 될 것이다.
물론 이게 만능 해결책은 아니다. 특히 과도기에는 무엇을 동의로 볼 것인지 해석을 두고 다툼과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재판부가 “피해자의 거부 의사를 무시하고 성관계를 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상대방의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로 폭행·협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는 부정의한 판결은 더는 선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법이 바뀌었을 때 판결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해보라!
박아름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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